문헌록 전자족보(대동보) > 문헌록
           
1. 문헌 목록 〉21. 21世 〉28. <부정공>동중추공휘광현가장(同中樞公諱光鉉家狀)
1. 문헌 목록 〉21. 21世 〉30. <부정공>귀정공휘병두묘갈명(龜亭公諱秉斗墓碣銘)
1. 문헌 목록 > 21. 21世 >  
29.<부정공>자헌대부공조판서월파공휘병기행장(資憲大夫工曹判書月波公諱秉琪行狀)
資憲大夫工曹判書月波公諱秉琪行狀 公諱秉琪初諱柄奎字其玉號月波趙氏自松京南渡玉川因封爲籍即高麗輔國玉川郡諱元吉號農隱諡忠獻子瑜號虔谷官副正麗社屋守罔僕義我太宗累徵大官不就子諱崇文號竹村諡節愍 端廟丙子與子諱哲山號龜川同殉後幷享于莊陵壇及東鶴寺肅慕殿謙川祠自後冠冕不絶蔚然爲東方華閥曾祖諱基衡 贈通訓吏曹佐郎祖諱恒 贈通政丞政院左副承旨考諱廣浩 贈嘉善户曹參判妣貞夫人光山李氏繼妣貞夫人長澤高氏時發女忠烈公敬命后母夫人得異夢 純祖辛卯六月三十日生公于雙山第形容端正目有重瞳 入學能曉大義往往有驚人句五歲失怙不離苫席擗踊哭泣如不欲生長老嘖嘖奉偏慈志體兼至事無大小必禀以行一日母夫人垂涕而言曰家運不幸酷禍至此前頭之事何以經過耶幸惟叔父在堂惟汝敎導之方足以事叔父如事父惟命是從詩禮舊業期乎勿墜此吾門昌大繫于汝身公俯首聽命叔父膝下暫不離焉自是以來叔父公撫之愛之無異己出且從伯友愛陵篤相對一室講磨經義故文辭日臻高妙聲譽藹蔚己而又與之相議修鄉約于坊内嚴條約立紀綱鄉風爲之丕變甲戌七月三十日遭内艱一如前喪式日展墓隣近士女感其誠孝至今相聚爲美談一日有過客來訪留連多日臨發題詩于壁上曰朝家正切求賢良誰識遐鄉遺逸民其後聞之乃繡使李某也 高宗甲午蒙優老典階通仕郎行義禁府都事陞嘉善大夫敦寧都正兵曹參議撓資憲大夫工曹判書推榮三世戊戌二月十六日卒于寝享年六十八葬于住岩面倉村竹田墻外枕巽原訃出識與不識莫不嗟悼曰長者逝矣執誄述哀以至傾郡配貞夫人咸安尹氏學儉女文肅公瓘后丁亥九月九日生己酉十二月十日卒墓月坪村後馬尾山丙坐育四男二女男曼燮淳燮一燮淵保女適升平朴儀東曼燮娶豊川任泰籙女無育以弟淳燮之子休中子之淳燮娶光山金致重女生体中出系伯父以弟一燮之子休在子之女興德張達鵬濟州高孟中妻一燮娶豊川盧光郁女生休文休在出系仲父餘不畫錄嗚呼公之儀容魁偉休休有長者之風好善惡惡而忠恕爲主故未嘗言及時事爲文好簡古厭浮華援筆立取亦超乎流俗之表而不幸未能一施於世但優老推榮豈公之素志也哉此李繡使所以慕其德傷其時而作詩表之者也可勝惜哉休文休中袖狀而來言曰此吾王考行錄也願賜一言而發揮焉余而人微文拙辭不獲按狀而序次如右 傍裔 休湜 謹撰 자헌대부공조판서월파공휘병기행장(資憲大夫工曹判書月波公諱秉琪行狀) 공의 휘는 병기요, 초휘는 柄奎며 자는 其玉이고 호는 月波인데, 조씨는 송경으로부터 남쪽으로 옥천에 내려와서 봉함으로 적을 삼으니 곧 고려 보국 옥천군 휘는 元吉, 호는 農隱, 시호는 忠獻이었다 아들 瑜의 호는 虔谷이요, 벼슬이 부정으로 고려가 망함에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키니 우리 이조 太宗이 여러번 큰 벼슬로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고, 아들 휘 崇文의 호는 竹村이요, 시호는 節愍인데 世祖丙子(一四五六)년에 아들 휘 哲山 호 龜川과 함께 죽어 뒤에 莊陵壇, 東鶴寺, 肅慕殿, 謙川祠에 같이 배향하였다. 이 뒤로부터 圭組가 끊어지지 아니하여 위해하게 동방 화벌이 되어, 증조 휘 基衡은 증 통훈 이조 좌랑이요, 조 휘 鎭恒은 증 통정 승정원 좌부 승지며, 고 휘 廣浩는 증 가선 호조참판이고, 비는 貞夫人光山李氏요, 계비는 정부인 長澤高氏 時發女로 충열공 敬命의 후손이다. 모부인이 특이한 꿈을 꾸어 純祖 辛卯(一八三一)년 六월 三十일에 공을 쌍산 본가에서 출생하니, 형용이 단정하고 눈에는 정기가 있으며 학업을 부지런히 하여 대의를 깨닫고 간간이 사람을 놀라게 하는 글귀를 지었다. 五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상차를 떠나지 아니하고 가슴을 두드리고 뛰며 곡읍하여 살아 남고자 아니 할 것 같이 하니 어른들이 큰소리로 칭찬하였다. 어머님을 모시며 뜻과 몸을 정성들여 봉양하고 일의 대소없이 반드시 말씀드린 연후에 행하였다. 하루는 모부인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가운이 불행하여 참혹한 화가 이에 이르렀으니 장차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다행이 숙부가 집에 계심으로 오직 너의 교도를 힘쓸 것이니 숙부 섬기기를 아버지 모시듯 하여 명령을 준행하고 詩禮 구업을 잘 지킬지어다. 우리 가문의 창성이 너한테 달렸다.』 하시니 공이 머리를 숙여 명을 받고 숙부 슬하를 떠나지 아니하였다. 이로부터 숙부공이 어루만져 사랑하기를 자기 소생과 다름없이 하고, 또 사촌 형님이 우애가 심히 두터워 한방에 거처하면서 경서의 뜻을 강론함으로 문장이 날로 진취하여 성망이 높았다. 이윽고 또 서로 의논하여 고을에 향약을 설립하고 조약과 기강을 엄정하게 세우니 고을 풍속이 크게 순화되었다. 갑술(甲戌)년 七월 三十일에 내간을 만나 한결같이 매일 성묘하니 인근 日士女가 그 誠孝에 감동하여 지금까지도 서로 모여 美談을 삼는다. 하루는 과객이 찾아와서 여러날 머물다가 떠나면서 시 한수를 벽상에 써 말하기를, 조정에서 간절히 어진 선비를 구하나 그 누가 머나먼 시골에 은일한 백성이 있는줄 알리요. 「朝家正切求賢良, 誰識遐鄉遺逸民」 하였다. 그 뒤에 들으니 수의 사또 이모였다. 고종 갑오(甲午一八九四)년에 우로 은전(優老恩典)으로 통사랑, 계질, 의금부 도사를 행직하다가 가선대부 돈녕도정 병조참의에 승진하여 자헌대부 공조판서로 발탁 삼세로 추영하였다. 무술(戊戌)년 二월 十六일에 향년 六十八세로 정침에서 별세하니, 주암면 창촌 죽전 담 밖에 침손원(倉村竹田墻外枕巽原)에 안장하였으며, 부고가 닿는 곳의 모든 사람들이 슬퍼하여 말하기를 어른이 돌아가셨다 하고 전 군(郡)이 나서 생전 공덕을 칭송하며 애사를 기술하였다. 배는 정부인(貞夫人) 함안윤씨(咸安尹氏) 학검(學儉)의 딸로 문숙공(文肅公) 관(瓘)의 후손인데, 정해(丁亥)년 九월 九일에 출생하여, 기유(己酉)년 十二월 十일에 별세하니 묘소는 월평촌후 마미산 손좌(月坪村後 馬尾山 丙坐)였다. 아들은 만섭(曼燮)·순섭(淳燮)·일섭(一燮)·연보(淵保)요 딸은 승평(升平) 박의동(朴儀東)의 부인이며, 손자는 휴중(休中)·휴재(休在)·휴문(休文)이고 나머지는 다 기록 아니한다. 아! 공의 용모와 의표가 웅위하고 상냥하여 장자의 기풍이 있고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며 충직(忠直)과 관서(寬恕)를 위즈로 한고로 일찍 세속일을 말하지 아니하고 문자에 간고(簡古)를 좋아하며 부화(浮華)를 싫어하여 붓을 잡으면 일필 휘지하여 세속에 초연하더니 불행히도 세상에 한번 쓰이지 못하고 우로추영 하니 어찌 공의 본뜻이겠는가. 이것이 이수사(李繡使)가 그 것을 사모하고 그 때를 근심하여 시를 지어 표한 바로다. 어찌 애석치 아니하겠는가. 휴문·휴중이 가장을 보이며 말하기를, 이는 우리 왕고 행록이니 원컨데 한마디 말을 더하여 현양하여 달라 하였다. 내가 사람이 우매하고 글이 보잘것 없어 사절하다 못하여 가장을 살펴 이상과 같이 서차함. 방예(傍裔) 휴식(休湜) 삼가 지음
 
1. 문헌 목록 〉21. 21世 〉28. <부정공>동중추공휘광현가장(同中樞公諱光鉉家狀)
1. 문헌 목록 〉21. 21世 〉30. <부정공>귀정공휘병두묘갈명(龜亭公諱秉斗墓碣銘)